중세 시대 와인에 대해 포스팅 하겠습니다. 베네치아는 중세말기 최고의 무역도시 였습니다. 수출 하는데 있어 문제점과 해결방식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13세기 제일 유명했던 보르도 와인은 영국시장을 독점했습니다. 영국의 소비자들이 선호했던 보르도 와인입니다. 또한 중세 유럽의 흑사병 위기 속에 피노 누아 와인이 어떻게 보존되었는지 포스팅하겠습니다.
- 베네치아 상인들의 와인 수출
- 보르도 와인의 명성
- 중세 유럽 흑사병 위기와 피노 누아 와인의 보존
베네치아 상인들의 와인 수출
중세말기 베네치아는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제노바를 물리치고 유럽경제를 주도하는 최고의 무역도시로 부상했습니다. 베네치아는 동방의 산물을 가져가 유럽에 비싼 값에 판매하는 중개무역으로 부흥하였습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방에 까지 진출하여 자신들의 거점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베네치아 상인 역시 와인 무역에 있어서는 입지가 부족했습니다. 베네치아는 영국으로 와인을 수출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었는데 바로 먼 운송거리로 인한 막대한 운송비였습니다. 보르도에서 와인을 가득 실은 선박이 출발하면 대개 1주일 내에 영구의 항구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그리스인들이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하여 대서양 연안을 거쳐 영국까지 가는데 최소 한 달에서 다섯 달이 걸렸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운송비가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다시 지중해 와인 가격에 반영되어 가격경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네치아 상인들은 보르도 와인의 약점을 공략한 것입니다. 지중해 와인은 도수가 높아서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었고 와인 독을 땅에 묻어 발효와 숙성을 시키는 경우 17도가량의 도수를 가진 와인을 제조할 수 있었습니다. 베네치아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상선을 가동하고 있어서 부피가 큰 와인 통들을 수송하는데 무리가 없었습니다. 물론 해적선을 만날 수도 있어 위험했지만 베네치아 상인들은 영국뿐만 아니라 플랑드르지역까지 진출한 상업의 제왕들이었습니다.
보르도 와인의 명성
프랑스의 대표적인 와인 생산지역 두 곳은 보르도와 부르고뉴 입니다. 그중 보르도 와인이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데에는 아키텐느 공국의 소유자였던 엘리오노르가 영국의 왕비가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13세기는 보르도 와인의 세기였습니다. 보르도 와인은 막강한 영국 시장을 얻게 되었고, 13세기말까지 영국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습니다. 13세기 중반에 영국 왕실이 주문하는 와인의 3/4이 보르도 와인이었다고 전해집니다. 영국의 보르도 와인 수입이 증가하면서 보르도를 중심으로 포도밭이 부챗살 모양으로 퍼져나갔습니다. 보르도 인근은 물론이고 남쪽으로 그라브 지역과 가론강, 도르도뉴강 일대로 포도재배가 확산되었습니다. 물량이 부족할 때에는 보르도에서 먼 지역의 와인도 보르도로 옮겨와서 보르도의 라벨을 달고 수출이 될 정도였습니다. 영국 소비자들은 에스파냐나 지중해의 짙은 빛깔의 와인과 달리 밝은 빛깔을 지닌 보르도 와인을 특별히 클라레라고 부르며 선호하였습니다.
중세 유럽 흑사병 위기와 피노 누아 와인의 보존
프랑스의 보르도 와인이 영국시장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면 해외 시장과의 연결이 어려웠던 부르고뉴 와인은 오직 품질로 승부해야 했습니다. 끊임없는 노력끝에 왕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부르고뉴 레드와인의 대표적인 품종인 피노 누아는 재배가 매우 까다로웠고 다른 품종과 달리 다른 지역에 옮겨 심어도 제 맛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부르고뉴 와인은 12세기부터 시토 수도회의 수도사들에 의해 피노 누아 와인으로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습니다. 13세기는 유럽경제가 크게 번영하던 시기였습니다. 부르고뉴 와인 역시 이러한 전반적인 호황 가운데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에 유럽이 경제 위기에 봉착했고 또한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전 유럽을 강타하며 부르고뉴 와인산업의 입지가 좁아졌습니다. 특히 재배가 까다로운 피노 누아 품종은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흑사병이 어느 정도 지나간 후인 1360년부터 가메 품종의 재배를 늘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보졸레 누보의 주요 품종인 가베는 피노 누아에 비해 맛이나 향이 떨어지지만 재배가 쉬웠고 수확량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부르고뉴의 공작이었던 필리프는 가메 품종이 법률과 풍습에 위배되는 품종이라 규정하였습니다. 가메 품종을 한 달 안에 모두 베어버리라 명령하고 대신 피노 누아를 심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그래서 포도 생산업자들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피노 누아는 부르고뉴의 대표 품종으로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다.